
달리지니/한윤호
(@Han_Y0U)
▒건망증▒
1)
“너무 쳐다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저자는 주인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악마거든.”
자스민은 반쯤 바랜 미소를 입꼬리 한쪽에만 올린 채 말했다. 그가 소개하는 건 한 남자였다. 키가 크고 어쩐지 장난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눈매를 가진 그는 그 얼굴이 가진 밝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어둡게 굳힌 채 자신의 주인인 자스민만을 굳게 바라보고 있었다. 전체적인 실루엣과 이목구비가 굉장히 준수한 남자였다. 자스민은 은은한 어조로 그를 소개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달리아는 남자를 향한 시선을 갈무리했다. 남자는 달리아에게 시선을 던지지조차 않았다.
“저 사람이요?”
“달리아, 너는 저것이 사람으로 보이나 보구나?”
“그렇...죠?”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려고 부른 자일 뿐이야. 가까이할 필요는 없겠지. 거기, 그만 가보도록 해.”
그는 자스민에게 고개를 꾸벅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자스민이 그를 악마라고 부른 것에 대해선 신경도 안 쓰는 투였다. 달리아는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어두운 표정이 신경이 쓰였다. 그는 마치 이 어두운 진흙탕에 잘못 들어온 나비 같았다. 자스민의 설명에도 그에게서는 이상한 순수함이 있었다. 이 진흙탕은 자파가 만들었고, 그 진흙탕을 어찌어찌 고치려던 자스민 마저 이 진흙탕에 온몸이 더럽혀졌는데, 그는 마치 그 위에 가볍게 날아앉은 나비 같았다. 하지만 그도 어느 순간 진흙투성이가 되겠지.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네.'
자그마한 아쉬움이, 가슴 속에 남았다.
2)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다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밤은 어두웠고 달빛과 정원에 켜진 등불만이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어둡게 비추었다. 그는 마치 달리아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아는 그의 눈빛을 보며 작은 현기증을 느꼈다. 달리아는 마치 그의 의도를 읽으려는 듯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달리아는 그제야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무지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아는 고민하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악마야, 자스민의 말이 어렴풋이 귀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당신, 시키는 건 무엇이든 해준다면서요?"
"... ... ."
달리아의 말에 그는 무엇인가를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퍽 처량했다. 어쩐지 속의 어딘가를 찡하게 울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도대체 그가 왜 달리아를 보며 무언가 전할 말이 있는 듯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왜 자신은 그런 그에게 말을 걸었는지, 그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달리아는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 밤의 달빛에는 그 전등에는 그런 것을 이해해 줄 것만 같은 빛이 있었을 수도 있었고, 혹은 달리아가 너무 지쳐있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저녁 산책이라도 할까요?"
"아... ... ."
그가 탄식하듯 대답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달리아는 그가 더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그의 팔짱을 끼고 정원 안으로 이끌었다. 그의 당황한 기색이 전해졌다. 달리아는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였지만, 그 한숨은 갑갑한 옷을 집어던졌을때 내뱉을 법한 안도의 한숨과 닮아있었다. 미친 것 같아, 아니, 미친 게 분명해, 달리아는 그와 정원을 걸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달리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우울한 눈으로 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비참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당신을 지켜봐 왔어요. 당신의 얼굴에 잔뜩 그늘이 질 때까지 당신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건...... . "
"그건, 자파 때문이죠. 그리고, 자스민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고요."
"... ... ."
남자의 표정은 더욱 우울해졌다.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안에서 말을 끊임없이 우물거리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그가 고해성사하듯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아는 숨을 참으며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나의 전 주인은, 자파였습니다."
"... ... ."
달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환상 같았던 몰입의 순간은 깨져버리고, 배신감만이 심장에 묵직하게 남았다. 달리아는 어째서 자신이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3)
남자는 어느 날 또 찾아왔다. 그 장난기가 엿보일 듯한 얼굴을 비참함으로 물들인 채 달리아 앞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달리아는 다시금 약한 현기증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달리아는 그를 끌고 정원을 걷고 있었다.
"술탄께서 당신을 노려보았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당신의 전 주인이 자파여서였겠죠."
"제가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는 없어요."
"아하, 그래서 이제는 자스민을 주인으로 섬기니, 봐 달라?"
"...그러면 안 되나요?"
남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러고 저러고를 떠나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자스민을 생각하면 달리아에게 떠오르는 건 후회뿐이다. 처음부터 술탄이 되겠다는 그의 꿈을 지지해주지 못했다. 자파가 그와 억지로 혼인식을 올렸을 때 달리아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앉아 그를 위로해 주는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달리아는 자스민이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찾을 때까지 도와준 게 없는 것만 같았다. 달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모든 건 엉망이 되었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가요?"
"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게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자신이 사랑했던 백성들을 제 군사의 손으로 베어버린 후 자스민은 어딘가가 크게 깨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깨진 부분으로 영혼이 빠져버렸겠지. 자스민은 더 이상, “왕족은 가장 불쌍한 백성이 행복한 만큼만 행복하다고 했어.” 따위의 말을 재잘대듯 반짝이는 눈에 담은 채 말하지 않는다. 아마 그의 영혼 깊숙이에서부터 흘러나왔을 듯한 그의 반짝임은 빛을 잃고 그의 온화했던 성정은 그 안에 조용히 묻혀 아마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자스민은 그 무엇보다 백성들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달리아는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다. 자스민의 나라는 피로 물들고 달리아는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 이 가시투성이 새장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달리아, 당신을 행복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겁니다."
"당신이 왜 나의 행복을 빌어요?"
그는 말에 달리아가 되물었다. 그가 놀라 달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달리아는 모든 걸 이해했다. 왜 그가 자신을 보며 우울한 눈을 하는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지, 왜 그가 말을 흐리는지, 왜 자신이 그를 볼 때마다 작은 현기증을 느끼는지.
궁의 달은 차가웠다. 달리아는 문득 그의 이름이 물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