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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지니/불소금별 (@BluestarseaK)

▒ 빛이 있으라  ▒  

 

***

 

거대한 나무가 고층 빌딩을 휘감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 금 간 벽, 부서져 구멍이 난 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과 달리 무너지기 직전의 기둥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있는 나뭇가지와 뿌리는 튼튼하고 온전했다. 더는 사람이 안에 있을 수 없는 망가진 건물 안에 햇빛이 스며들며 바람이 불어 싱그러운 초록빛 나뭇잎이 흔들리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기괴한 실내장식처럼 보였다. 마치 인류가 멸망한 후 자연에 집어 삼켜진 지구를 엿본 것 같았다.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 아래 단정하게 흰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 재난 현장에서 홀로 우아하게 빛났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옷자락도 유리 파편과 콘크리트 조각을 밟고 걸어가는 신발까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촘촘히 연결된 나뭇가지를 따라 우거진 나뭇잎을 헤치고, 단단한 나무 기둥과 뿌리를 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뭇가지는 얼핏 보면 제멋대로 뻗어 있는 것 같지만 무언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노래의 끝 부분을 읊조리며 나뭇가지를 들어 올리자 텅 빈 공간이 나왔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 한 명이 나무의 중심에 서 있었다. 나무뿌리에 팔과 몸이 얽히고 그 때문에 옷과 피부가 찢겨 피와 진흙이 말라붙어 있는 여자는 남자의 깔끔한 모습과 대조되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남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여자가 눈을 떠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잘 다듬어진 미소에 가려졌다. 이에 그녀의 고동빛 눈동자는 분노로 일그러졌다.

 

“본인의 범죄 현장을 구경하러 왔어요?”

“아직 이 건물에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히어로와 빌런,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뒤섞여 삶을 이어가는 도시 아그라바.

 

“그게 당신인 줄 알았지만, 당신이 아니길 원했어요.”

“빈말은, 아그라바에서 이 정도의 나무를 자라나게 할 히어로가 저 외에 없잖아요.”

 

빌런 지니와 히어로 달리아가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지니는 달리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가시덩굴이 왕자를 막듯, 나뭇가지들이 뻗어 나갔다.

 

“할 말 있으면 거기서 말해요.”

“우리 사이에 거리라니, 지니는 슬프네요.”

 

호들갑스레 흘리지도 않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는 시늉을 하며 우는 소리를 내는 지니의 모습에 달리아는 머리가 아팠다. 누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지니를 빌런이라 상상하겠는가. 자신조차 그의 의도적인 친절에 몇 번 마음이 흔들려 곁을 내주었다. 그 결과 멋대로 빌런 지니만의 친구 리스트에 등록되어 시도 때도 없이 사건 현장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제가 일반 시민이어도 이 건물 테러의 테러리스트 용의자를 친절하게 대하겠어요?”

“용의자라뇨? 제가 테러리스트입니다. 지니 외에 누가 이런 화려한 폭발을...”

“지니!”

 

달리아의 분노에 나무가 진동했다. 부서진 건물의 지지대 역할을 하던 나무가 흔들리자 건물이 무너질 듯이 요동쳤다. 달리아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유지하려고 하며 그녀를 도발하기 위해 손가락 끝에 건물에서 일어난 폭발과 같은 불꽃을 반짝, 하고 보여주는 지니를 노려보았다. 그는 선심을 베풀듯이 말했다.

 

“당신도 이제 슬슬 나가세요. 우리 둘 외에 이 건물 안에 사람은 없어요.”

“네놈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그는 대답 대신 모자챙을 쥐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난리판에 무슨 허례허식인지 따지려다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꽃을 보았다. 그의 모자를 장식한 붉은 달리아였다. 그는 사랑을 고백하듯이 꽃을 신용 담보로 제시한 것이었다.

 

“...고작 꽃 한 송이를 믿으라고?”

“아무 꽃이 아니니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리아’에 맹세하니 절 믿어주시겠어요?”

 

이 상황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추파를 던지는 지니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달리아는 나무줄기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나무의 꼭대기의 잎새 하나부터 가장 깊은 콘크리트에 박힌 실뿌리 하나까지 이용해 건물 안과 주변에 산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철저하게 탐색한 다음에 취한 행동이었다. 달리아는 크게 혼날 걸 예상하고 몸을 약간 움츠린 지니를 말없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 같아선 식물로 먼지 나게 패주고 싶지만, 지금은 탈출이 더 급했다.

 

“안 가고 뭐 해요?”

 

당연히 자신의 뒤를 쫓으며 이런저런 말을 쫑알거릴 지니가 따라오지 않자 그녀는 멈춰 서 뒤를 돌았다. 지니는 그녀가 방금 빠져나온 나무에 기대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이별 후에 홀로 여행을 떠나는 전 연인의 소식을 듣자 다시 시작하자 말하려고 여차여차 공항까지 쫓아가나 극적인 효과를 위해 놓친 배우처럼 당신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어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달리아의 표정에 지니는 두 눈이 빛났다. 입가에는 좀전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아닌 등골이 오싹해지는 비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일 화려한 피날레를 내버려두고 가긴 어디를 가요. 불꽃놀이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폭탄을 불꽃놀이라고 농담할 상황이에요?!”

“빛과 열의 작용이라는 점에선 같잖아요? 같이 구경할래요?”

“미쳤어요?! 지금 폭탄이 터지기 직전...!”

“내 목숨이 중요해요?”

 

그의 질문에 순간 망설였지만, 달리아는 노련한 히어로였다. 그녀는 평정을 되찾고 빌런을 회유할 때 정해진 매뉴얼대로 답변했다.

 

“저는 히어로이므로 아그라바의 시민인 그대를 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민? 전 빌런이에요. 히어로가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게 제 의무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죽길 바라잖아요. 그의 뒷말은 처음부터 나쁜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일침을 다시 삼키게 했다. 달리아는 지니를 노려보기만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히어로는 사람을 구하는 초능력자라는 이미지가 더 강력하지만, 본질은 경찰처럼 국가의 법과 도덕을 수호하는 직업이었다. 처벌은 히어로의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반인륜적인 짓을 하는 범죄자일지라도 히어로라면 이성적으로 그들을 체포하는 것을 최우선시해야 했다. 정의를 지킨다는 명목에 취해 함부로 타인을 벌하거나 죽여서는 안 되었다. 법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힘을 남용하는 것은 빌런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에.

 

“그냥 날 내버려둬요. 전 경치 좋은 곳에서 멋진 불꽃놀이가 보고 싶을 뿐이라고요. 또 사람이 다 대피할 때까지 착하게 기다렸잖아요?”

 

그 때문에 모든 히어로는 한 번쯤은 지금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자신의 눈앞에 있는 빌런을 구해야 하는가. 그는 달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는 가장 숨기고 싶은 속마음을 찾아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지니.”

“역시 저랑 같이 보고 싶죠? 아닌척해도 달리아가 절 좋아할 줄...”

“사람을 죽였을 때 무슨 생각 해요?”

이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할 걸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지 지니의 눈에서 일순간 당혹감이 스치고 눈썹이 꿈틀거렸다.

 

“히어로님, 전 신실한 빌런이라 변명 따위 하지 않아요.”

 

비록 눈 한 번 깜빡일 찰나에 평정심을 되찾고 심드렁하게 그의 악의를 드러냈다. 한술 더 떠 이빨이 다 보이게 웃으면서 모자를 벗고 팔을 옆으로 뻗어 고개 숙였다. 그 몸짓은 정중함을 넘어 과장스러워 광대와 같았다. 지니는 그의 악을 선처럼 여기며 당당하게 그걸 드러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빌런이었다.

 

달리아는 그를 패서 죽일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려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지니는 그녀의 공격을 방어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노을빛으로 물든 수평선과 같은 색이었다. 호기심으로 빛나지만 속을 알 수 없었다. 오만가지 감정으로 흐트러진 그녀와 다르게 지니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느긋하게 그녀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래서 달리아는 지니에게 입을 맞췄다. 실상은 그의 입술을 뜯어낼 것처럼 깨무는 것이었지만 입맞춤은 입맞춤이었다. 약간의 무게만 실렸을 터인데 지니의 몸이 뒤로 넘어졌다. 그의 몸이 기울어지며 주변 배경이 일그러졌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 그녀의 눈에 사물의 움직임이 뚜렷하고 정적이었다.

 

지니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다시 중심을 잡자 달리아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아는 곧바로 무전기를 꺼내 동료에게 연락했다.

 

“히어로 달리아, 건물에 남아 있던 시민 한 명과 무사히 탈출. 부상자는 차후에 결과를 보고하고, 사망자 0명으로 테러 현장 구조 작전을 마무리합니다.”

 

사상자 없이 전원구조라는 소식에 무전기 너머로 동료 히어로들의 함성이 들렸다. 그녀도 같이 그 기쁨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지니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무전기를 끄자 지니는 곧바로 질문했다.

 

“왜 그랬어요?”

 

그의 말 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왜 그를 구했는가, 왜 그에게 입맞춤을 했는가. 그는 빌런인데.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이 아닌가요?”

 

왜 그녀에게 시민이 다 대피했다고 알려줬는가, 왜 그녀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건물을 폭발시키지 않았는가. 그녀는 히어로인데.

 

“좋아요, 오늘은 비긴 걸로 하죠.”

 

빛으로 어둠은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짙고, 어둠으로 빛을 감싸기에는 너무 환하다. 지니는 그의 내면을 간파당했지만 늘 그렇듯 감정을 숨기고 매끄러운 미소로 화답했고, 달리아는 그런 그에 대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노려보았다.

 

“그리고 의뢰는 의뢰니까.”

 

건물이 폭발했다. 지니가 불꽃놀이를 운운한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건물은 붉은빛, 주황빛, 황금빛으로 너울거렸다. 흔히 사람들은 어둠의 반대는 빛이라 한다. 그런데 빛이 너무 강하면 눈이 멀어버린다. 어둠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기에 어둠이라면, 빛으로 눈을 뜰 수 없는 것도 어둠이 아닌가. 빛은 어둠에, 어둠은 빛에.

 

“다음에 또 봐요, 달리아.”

 

그녀의 이마를 스치듯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더니 지니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빌런이라고 중얼거리며 달리아는 화재를 진압하러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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