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지니/러버
"달리아, 우리가 평화로운 때에, 평범한 관계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
무릎에 누운 지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달리아는 조용히 무릎에 누운 연인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지금 아바브와는 전쟁 중이다.
▒Love like you▒
1.
연구원 기숙사의 불편한 침대에 누울 때마다 지니는 되뇌었다.
나는 행운아야.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 말은 반은 사실이었고, 반은 죄책감을 덮기 위한 자기위로였다.
영토 확장을 위한 준비가 가속화되고 센티넬들에 대한 관리가 엄격해지면서, 지식인들은 날로 센티넬의 인권 문제를 외쳤다. 대학원생이었던 지니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았다. 센티넬들은 엄청난 능력을 갖췄지만 적은 인구에 불과했고, 태어날 때부터 국가의 감시와 관리하에 살았다. 전체 인구의 3%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는 그들을 변호하기 위한 목소리는 적었고, 국가는 그들을 이용했으며, 어떤 이들은 푸른 피를 흘리는 그들을 멸시했다. 지니는 그 모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니가 일하는 연구소는 사실상 그 문제의 핵에 가까운 곳이므로 그는 애써 외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 일하지 않으면, 나는 다시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또 빌어먹고 살아야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이건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이뤄주는 일이다.
적어도 나는 정당하다.
지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 밤 다시 되뇌었다.
2.
센티넬 연구소 앞에 시위가 열리던 날, 연구소장은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
그것이 죄책감을 가리기 위한 파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늘 결과에 쫓겨 다니는 직장인에 불과한 연구원들에게는 이런 것마저 나름 일탈이었으므로, 다들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니 역시 오랜만에 구두끈을 고쳐매고 정장을 입었으며, 댄스를 즐겼다.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저랑 춤 한 번 추실래요?"
자신에게 춤을 권하는 여인이 SSS급 센티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3.
그의 이름은 지니고 그녀의 이름은 달리아라는 것. 오늘의 파티. 연구원의 삶. 그런 것을 이야기하던 것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직업으로까지 이어졌고, 지니는 그녀가 데이터로만 보던 센티넬이라는 것을 알았다. 댄스 타임은 끝이 났지만 두 사람은 마주앉아 그녀가 오늘 왜 굳이 이 자리에 왔는지, 전 세계의 공공재인 SSS급 센티넬이 전쟁 때문에 국가에 귀속된 시국과 모든 센티넬의 인권 문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지니는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내게 당신이 센티넬이라는 걸 알려준 거죠?"
"굳이 감춰야할 이유가 있나요?"
"센티넬을 멸시하는 이들도 많은데, 내가 당신을 해할 지는 어떻게 알고요."
그 말에 달리아는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지니는 그 날 밤마다 하던 되뇌임 대신 달리아를 생각했다.
4.
실험체 B-6
달리아 (SSS)
육중한 문 가운데의 푸른 종이를 보면서 지니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연구소를 넘어 센티넬 합숙소에까지 온 것도 처음,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도 처음. 그녀를 만나고 유독 처음인 것이 많다고 생각하며 지니는 손에 밴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노크를 하고 문이 열리기까지, 영겁 같던 시간이 지나면 기다리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왔어요?"
"...그냥 왔어요."
"왜 오셨죠?"
"밤... 산책이라도 같이 갈까 해서요. 오늘 달이 예뻐요."
머릿속에 세워둔 계획은 속내를 읽기 힘든 표정에 모두 뒤죽박죽이 되었고, 지니는 무작정 숨겨두었던 꽃을 꺼냈다.
"저랑, 데이트... 하실래요?"
달리아는 예의 웃음을 지으며 꽃을 받았다.
5.
밤은 깊었고 두 사람은 잘 맞았다.
지니는 달리아가 전쟁 준비로 이곳에 끌려온 다음부터는 달력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달리아는 지니가 빈곤지대 PMAL에서 살다 J 재상의 천거로 이곳에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될 만큼,
두 사람은 종종 밤산책을 했다.
6.
"지니, 이 잼이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진 건지 알아요?"
"음... 글쎄요. 아바브와?"
"아뇨. 아그라바라는 곳이래요. 그곳의 술탄은 덕망이 높고, 백성들을 사랑한대요."
"........"
"우리, 전쟁만 끝나면 그곳으로 가요."
달리아는 먼저 입을 맞춰왔고 그는 그녀를 껴안아, 연인은 한 몸이 되었다.
7.
지니는 때때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착각이려니 했고, 그다음에는 달리아를 만나기 위해 잠을 줄였기 때문일까 생각했으나, 달리아가 그의 사정을 봐준 후에도 역류할 것만 같은 속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니! 괜찮아? 너, 너, 지금..."
근무 중에 푸른 피를 토하고 병원에 실려 간 후에야, 지니는 자신이 가이드로 후성 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
지니가 가이드가 되었다는 소식은 조용한 연구소 내에 금방 퍼져나갔다. 비밀이었던 달리아와의 연애도 발현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금방 가십으로 소비되었다. 병원에서는 센티넬과의 접촉이 있었다고 발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았으나 사람들은 사실 정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지니가 발현을 막으려고 한 자해한 것이 알려진 후에야 조금 잠잠해졌다. 어쨌거나 연구소장은 값싼 연구원 임금으로 가이드를 굴릴 수 있게 되었음을 흡족하게 여겼다.
달리아는 당신이 나를 치유해주니 이것만큼 완벽한 연인관계가 어디 있냐고 했지만, 이제 지니는 그녀의 눈 속의 슬픔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9.
전쟁이 시작되었고, 센티넬의 상처를 보는 것은 가이드의 숙명이었다. 지니는 그녀의 상처를 볼 때마다 울었고, 전쟁에 익숙한 달리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은 이제 산책로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연구실에서 만났지만, 그곳에서는 키스하지 않았다. 둘을 지켜보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도, 그것만은 사적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10.
누군가는 지니가 너무 울어서 달리아의 회복이 느린 것 아니냐고 농담을 했지만, 전쟁이 깊어지고 서포팅이 더 힘들어지자 지니를 향한 시선은 따가워졌다. 비용 때문에 붙인 파트너였지만 사실 처음부터 SSS급 센티넬에게 B+급 가이드는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군부에서 상위랭크 센티넬을 위험하게 하는 이런 행위는 처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호되게 경고한 뒤에야 달리아의 가이드는 SSS급 가이드로 바뀌었고, 동료였던 이들은 지니를 애물단지 취급했다. 달리아는 그들이 지니를 하대하는 것을 가만두고 보지 않았지만, 비웃음은 지니가 달리아에게도 버려진 개라는 식으로 바뀔 뿐이었다.
11.
이전과 똑같이 연구원의 신분으로 돌아왔지만, 달리아가 없는 곳에서 지니는 더 많은 폭언을 들었다. 그러나 지니가 가장 괴로운 것은 달리아가 다쳐서 돌아와도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싸운다던 연인.
가장 적군과 가까운 곳에서 싸우는 센티넬.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우리 도망가자던 말에는 쓰게 웃던 달리아. 아, 달리아.
침대에 누운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지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2.
이제 파트너가 아니게 된 연인은 주로 회복을 끝낸 후에 달리아의 방에서 만나곤 했다.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지니를 멸시하는 이들을 피할 수 있는 곳. 지니는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한 품에 안고 키스하곤 했고, 달리아는 기쁘게 그를 맞았다. 그러나 오늘은 지니가 달리아의 품에 먼저 안겨들었다.
"지니, 무슨 일이에요?"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대답하는 내용과 달리 고개를 돌려 보이는 지니의 얼굴은 어두웠다. 지니는 어떤 폭언을 들어도 달리아의 앞에서는 티 내지 않았고 달리아가 묻는 것이라면 언제나 대답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오늘따라 입맞춤은 조심스럽고, 작은 스킨십 하나하나마저 간지러울만큼 애틋해서, 달리아는 차마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더 묻지 못하고 연인과 입을 맞췄다.
13.
그가 오지 않는 것이 의아해 달력에다 날을 체크한 지만 벌써 일주일. 연인에 대한 불안을 달래는 것 또한 연인과의 추억이었다. 둘만의 방과 달 밑에서 나누던 이야기, 댄스 파티, 밤산책을 가자고 서투르게 말을 하던 그를 생각하고 있으면 타이밍 좋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을 열고 마주한 얼굴은 지니가 아니라 낯선 연구원이었다.
"달리아 님은 다음 전투부터는 회복실에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구원은 작은 보석을 내밀었다. 푸르게 반짝이는 작은 보석이었다.
"왜죠? 이건 뭐고요. 그리고... 그리고, 지니는요?"
"ㅡ받으신 그게, 지니 연구원입니다."
달리아는 지니가 랭크로 올리려다 영혼석이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은 가이드의 랭크 상승 실험과 거기에 자청한 지니의 이야기까지 들으며 정신은 아득해진 달리아에게, 연구원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지니 연구원이 실험 전 각서와 별개로 달리아 님께 보내달라고 부탁한 편지입니다."
달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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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달리아,
아그라바로 가요.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그리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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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는 푸른 보석을 안고 무너져 울었다.
아, Genie.
당신 같은 사람은 없어요.